Mar 8:1 그 즈음에 또 큰 무리가 있어 먹을 것이 없는지라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Mar 8:2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저희가 나와 함께 있은지 이미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 Mar 8:3 만일 내가 저희를 굶겨 집으로 보내면 길에서 기진하리라 그 중에는 멀리서 온 사람도 있느니라 Mar 8:4 제자들이 대답하되 이 광야에서 어디서 떡을 얻어 이 사람들로 배부르게 할 수 있으리이까 할렐루야, 성도님들, 새해, 하나님의 복 많이 받으시길 빕니다. 그냥 복이 아니라, 오늘 말씀에 나오는 칠병이어의 복 받으시기 원합니다. 새 해 첫날 말씀에, 무리가 먹을 것이 없었다, 라고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걱정하지 마시길 원합니다. 주님이 먹을 것이 없는 그들을 어떻게 여기셨다 말씀이 이야기 합니까? 불쌍히 여기셨다. 여러분, 우리 하나님은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어려울때, 독하게 너가 알아서 해봐라, 고난도 삶에 한 부분이니 참아봐라,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지치고, 고난당하는 인생을 보시고, 아무 감정을 느끼시지 않는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 하나님은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얼마나 위로가 됩니까.. 오늘, 우리는 단순히 빵을 얻으러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아닌 줄로 믿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따르기에, 배고픔에도 직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십시오. 누구보다도 먼저 우리의 필요를 아시고, 불쌍히 여기시며, 그의 불쌍히 여기심이 기적을 일어나게 만듭니다. 이 새해 첫주, 우리는 예수님이 단순히 빵이 없을 때 빵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 그 이상을 주시는 분이신 줄을 깨닫고, 이 2021년 한해, 빵 이상의 축복을 받으시는 성도님들 다 되시길 축원합니다. 그러면 오늘 이 기적을 보면서, 마가복음 8장 전체에 흐르는 메시지를 깨닫길 원합니다. 8장 전체에 에피소드의 흐름을 보면, 6장에서의 오병이어 기적과 비슷하게, 4000명을 일곱개의 빵과 물고기 2마리로 먹이시는 것을 봅니다. 그리고 배를 타시고 건너가시는데, 바리새인들이 어디서 나왔는지 갑자기 하늘로서의 표적을 보이라고 하지만, 주님은 절대 주지 않겠다 하시고 다른데로 가십니다. 또 제자들에게 이 바리새인과 헤롯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하시지만, 제자들은 그것을 깨닫지 못해 예수님께 나무람을 듣습니다. 그리고 벳새다라는 곳에 도착해서 한 소경을 고치시고, 가이사랴 빌립보라는 동네로 가서 베드로의 고백을 들으시고, 거기서 처음으로 자신이 이제 고난 받으시고 죽으시고 사흘만에 살아날 부활의 계획을 말씀해 주십니다. 이것이 오늘 8장 에피소드들의 전개의 순서입니다. 이것들이 단순히 흩어져 있는 말씀들이 아니라, 하나의 큰 문맥에서 오늘 일어나고 있고, 그 문맥을 우리가 바로 잡을때, 우리에게 전달하시는 중심 메시지를 들을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그럼 먼저,, 6장에 나온 5000명을 먹이신 오병이어의 기적과 오늘 8장에서의 4000명을 먹이신 칠병이어의 기적을 좀 구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말씀의 주제의 윤곽이 잡힙니다. 먼저, 첫째, 숫적인 차이들이 있습니다. 5000과 4000의 차이가 있죠, 다섯개의 빵과, 일곱개의 빵의 차이가 있습니다. 열두 광주리와 일곱 광주리의 차이가 있습니다. 둘째, 양식의 차이가 있습니다. 배경의 차이가 있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서쪽 갈릴리 지방에서 이루어졌고, 칠병이어의 기적은 동쪽 갈릴리 지방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한 아이의 빵과 생선을 통해 이루어졌고, 칠병이어의 기적은 제자들이 가지고 있던 떡과 생선으로 이루어집니다. 오병이어의 기적때는 오십 씩 백씩 군대의 단위를 써서, 나누어서 잔디에 앉혔다고 하고 있고 여기서는 그런 말이 없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때는 하나님을 축복하는 유대인식의 기도를 예수님께서 하고 있고, 칠병이어의 기적때는 빵을 위해 감사하고, 생선을 위해 또 감사하는 이방인식의 기도를 하고 계십니다. 오병이어 때는 그날 저녁이 되서 이런 기적을 행하신 것이고, 칠병이어때는 사흘동안 자신을 따라오던 무리에게 이 기적을 행하신 것입니다. 한 두가지만 우리에게 힌트를 주었어도 알 것인데, 지금 오병이어와 칠병이어의 차이점이 생각보다 많이 있습니다. 하나는 유대인들에게 이루어진 기적이고, 하나는 이방인들을 대상으로 이루어진 기적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다른 주제를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5000과 4000,, 5와 4는 성경에서 많이 다릅니다. 오는 유대인의 숫자입니다. 특히 모세 오경을 생각하면 됩니다. 4는 사방을 이야기 합니다. 만국을 주로 이야기 합니다.5000은 여호수아서를 보면, 아이성을 점령하기 위해, 선택되었던 매복자들이 오천입니다. 무리를 나뉘어 앉혔다는 말,,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군대라는 표현을 늘 써왔습니다. 하나님의 군대, 이스라엘 민족을 이야기 합니다. 5개의 빵과 일곱개의 빵도 마찬가지, 말했던 것처럼 다섯개의 빵은 유대인을 위한 모세오경과,, 일곱개의 빵은 이방인을 위한 노아의 칠계명을 이야기 한다라고 볼 수 있습니다. 노아의 칠계명은 이방인을 위해 하나님께서 주셨다는 가장 기본적인 인간으로써 지켜야 하는 법입니다. 우리는 잘 알지 못하지만, 유대인의 전통에서 노아의 일곱계명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또한, 12광주리는 당연히 이스라엘 지파를 상징할 것이고, 7광주리는 전체를 대표하는 숫자입니다. 가나안땅에 들어갔을때, 거기에 7 나라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7은 세상의 나라 전체를 의미합니다. 광주리라는 용어도 오병이어때는 유대인들이 지녔던 크지않은 코셔음식을 담는 광주리를 이야기 하고 있고, 칠병이어때는 이방인들이 보통 의미했던 이민가방같은 크기의 광주리를 이야기 합니다. 바울이 광주리에 내려서 그 성에서 도망갔다라고 했을때, 바로 그 큰 광주리입니다. 그러면, 오병이어의 기적은 유대인에게 보여주신 기적이고, 칠병이어의 기적은 이방인에게 보여주신 기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 이 기적들이 일어나는 장소도, 오병이어는 갈릴리 호수 서쪽이고, 이곳은 동쪽 이방지역입니다. 그럼, 이곳에서 우리가 집고 넘어가야 할 포인트가 뭐냐 이것입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분해서 이런 기적을 보여주시고 있는 의도가 뭐냐 이것입니다. 첫째, 유대인들이 기적을 체험하는 소스를 보십시오. 누구의 빵과 물고기로 예수님이 기적을 일으키십니까? 한 아이입니다. 그 아이가 아니었으면 이 기적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한 어린 아이가, 예수님이 가져오는 기적의 매개체입니다. 칠병이어의 기적은 누구의 빵과 물고기로 일어납니까, 제자들이에요. 자, 이제, 분명해 집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 예수님의 빵과 물고기를 체험하는 유일한 방법은 아이의 마음입니다. 유대인들의 문제는 머리가 큰 거였습니다. 선민의식, 율법의식, 바로 다음에 나오는 바리새인들 보세요. 예수님께 하늘로서 내려오는 표적을 구합니다. 예수님의 모든 기적을 체험하고 예수님의 모든 말씀을 들었음에도, 자신들이 생각하는 규격과 틀에 맞는 자를 메시야로 인정하겠다 예수님꼐 말하는 겁니다. 예수님이 유대인들과 제자들 앞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한 아이를 데려다 놓고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Mat 18:3 가라사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유대인들이 예수님께 오지 못하는 가장 큰 문제는 그들의 영적 교만함, 우월감이였습니다. 그래서, 오병이어의 기적은 어린아이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기적입니다. 어린아이의 마음을 들어 많은 사람들에게 양식을 주는 기적입니다. 유대인들에게 딱 맞는 기적이에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먹고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어린아이처럼 되는 것입니다. 반면에, 칠병이어에서 빵과 생선은 제자들에게 있었습니다. 제자들의 빵과 생선으로 인해, 이방인들이 배불리 먹게 됩니다. 예수님이 이방인들에게 전하실 복음의 루트는 제자들을 통해 이루어 질것이라는 것을 이야기 하고 계십니다. 제자들의 중요한 이방 사역의 사명을 이야기 하십니다. 또 다른 중요한 포인트는 이방인들의 무리는 예수를 사흘동안 쫒았다는 것입니다. 그 중에는 멀리서 온 사람도 있느니라, 이방인들 중에서도 정말 멀리서 온 이방인들까지 다 포함하시는 것입니다. 사흘이라는 단어가 성경에서 늘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예수님이 몇일 만에 부활하셨습니까, 사흘이에요. 예수님의 부활 사실을 믿고 영접할 자들로 이방인들이 더 큰 무리가 될 것이라는 암시입니다. 삼일을 같이 하지 않은 사람은 이 기적을 체험하지 못하고 돌아갔겠죠.. 하지만, 삼일동안 같이 예수와 함께 한 사람은, 모두 이 놀라운 기적을 경험하게 됩니다. 결국, 여기서 부터, 복음의 흐름이 경로가 틀어질 것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강력하게 시사하고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를 믿게 되는 무리는 결국 이방인들이 먼저가 될 것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계십니다. 이 두 중요한 포인트를 보고, 이제 다음 에피소드들과 연결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그럼, 8절로 13절 까지를 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Mar 8:8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 일곱 광주리를 거두었으며 Mar 8:9 사람은 약 사천명이었더라 예수께서 저희를 흩어 보내시고 Mar 8:10 곧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오르사 달마누다 지방으로 가시니라 Mar 8:11 바리새인들이 나와서 예수께 힐난하며 그를 시험하여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구하거늘 Mar 8:12 예수께서 마음 속에 깊이 탄식하시며 가라사대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적을 구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세대에게 표적을 주시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Mar 8:13 저희를 떠나 다시 배에 올라 건너편으로 가시니라 자 잘보십시오. 13절에, 저희를 떠나, 건너편으로 가시니라,, 이 말 한마디는 앞으로의 복음의 진로를 말씀해 주십니다. 표적을 구하는 바리새인들에게 너희들에게는 표적이 보이지 않을 것이다,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말씀하시고 그들을 떠나 반대로 가시는 것이에요. 유대지역 달마누다로 왔는데, 오자마자 다시 어디로 갑니까, 건너편 이방지역으로 가시는 거에요. 바리새인들이 하늘로써 오는 표적을 구하는데, 예수님꼐서 마음 속 깊이 탄식하셨다.. 합니다. 뭐 때문에 그렇게 깊게 탄식하셨을 까요? 우리가 예수님을 탄식하게 하는 일이 뭡니까? 마음이 돌처럼 딱딱하고, 믿음이 없는 때입니다. 이제까지 보여준 많은 기적들과 들려준 많은 말씀을 통해서도, 여전히 마음은 더 딱딱해져 갔던 겁니다. 바리새인들과 군중들만 이런게 아닙니다. 제자들까지도, 이런 기적들이 연속될 수록 믿음의 눈이 열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닫힙니다. 더 딱딱해집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들어보세요. 바리새인들에게만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대,, 곧 바리새인들의 세대, 바리새인들의 전처를 밟고 있는 모든 유대인들을 이야기합니다. 그들에게는 표적이 주어지지 않을 거라 합니다. 사실 이 표적이 무엇인지, 우리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을 보면 압니다. 동일하게 바리새인들이 표적을 구하러 온 적이 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다른 표적이 없이 오로지 한가지 표적만을 주겠다고 했습니다. 바로, 요나의 표적입니다. 요나의 표적이 뭐냐 곧 죽었다가 사흘만에 부활하실 부활의 표적을 이야기 합니다. 그런데, 오늘 마가복음에서는 그 표적마저 주어지지 않겠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은, 그 표적이 안 주어진다는 말이 아니라, 주어져도 볼 수 없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할 것이라는 이사야서의 말씀 기억합니까, 심지어 제자들 까지도 이런 현상을 겪습니다. 18절 보세요. Mar 8:18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또 기억지 못하느냐 예수님이 보이실 한 가지 표적은 부활입니다. 모든 다른 기적들은 이 부활의 예수를 가르키기 위한 표식입니다. 오늘, 사흘 동안 이방인들은 예수를 따릅니다. 그리고 제자들을 통해, 이런 칠병이어의 기적을 통해 예수의 빵과 고기를 받아 먹게 됩니다. 바리새인들의 세대는 결국 이 표적을 보지도, 듣지도 못하고, 깨닫지 못합니다. 하지만, 오히려 이방인들은 보고 듣고 깨닫게 된다는 말씀이에요. 예수님께서 그들을 떠났다 했습니다. 복음을, 부활을 받아 들이지 못할 이스라엘을 떠난 모습을 암시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다음 에피소드를 보게 됩니다. 제자들까지도, 믿음없음이 드러나는 에피소드입니다. 또 다시 빵의 문제입니다. 14절에서 18절 가서 읽어봅니다. Mar 8:14 제자들이 떡 가져 오기를 잊었으매 배에 떡 한 개 밖에 저희에게 없더라 Mar 8:15 예수께서 경계하여 가라사대 삼가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신대 Mar 8:16 제자들이 서로 의논하기를 이는 우리에게 떡이 없음이로다 하거 늘 Mar 8:17 예수께서 아시고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 떡이 없음으로 의논하느냐 아직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둔하냐 Mar 8:18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또 기억지 못하느냐 오늘 이 에피소드가 8장 전체의 흐름에서 가장 중심적인 에피소드라고 생각합니다. 17절 주님이 제자들을 나무라십니다. 너희가 어찌 떡이 없음으로 의논하느냐,, 계산을 해보면 간단합니다. 떡 다섯개로 5000명이면, 떡 하나가 1000명을 먹이는 꼴이고, 떡 일곱개로 4000명이면 적어도, 떡 하나로, 571명을 먹이는 꼴입니다. 그래서 평균을 내보면, 떡 하나로 적어도 786명을 먹일 수 있다.. 이런 별 필요없는 수학적 계산이 나옵니다. 하지만, 적어도, 이런 계산은 초등학생도 할 수 있는 법인데,, 제자들이 이것을 못해서 못믿는 것일까요? 제자들이 초등학생의 아이큐도 없어서 이것을 모르는 것일까요? 제자들이 오병이어의 기적과 칠병이어의 기적을 완전히 잊어버렸습니까? 잊어버리지 않았어도, 잊어버린 것과 같은 현상을 겪고 있습니다. 왜냐, 그 의미를 결국 두 기적에서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잖아요.어찌하여 깨닫지 못하느냐… 그 기적들을 통해, 그들이 깨달아야 되었던 더 깊은 진리가 있었다는 것이에요. 그것이 무엇인지를 우리 성도님들은 오늘 깨닫게 되시길 축원합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아주 중요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삼가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신대” 누룩은 효모입니다. 곰팡이이죠. 조그만 양을 통해서도, 효소 작용을 통해서, 전체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단세포입니다. 어마어마한 속도로 증대하는 균이에요.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은 그들의 가르침을 의미합니다. 그들의 가르침이 조금이라도 들어오면,, 그 사람이 부풀어 오를 것이라는 말이죠. 바리새인들은 율법주의자이고, 헤롯은 타협주의자입니다. 헤롯과의 통치를 유지하기 위해, 그리스문화와 로마의 통치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자들이 바로 헤로디안, 헤롯파입니다. 신기하게도, 둘이가 맞지 않는데, 둘이가 연합하여 예수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둘 모두의 가르침이 복음을 죽이는 무서운 맹독이라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우리 교회에게 있어 외부에서의 핍박은 사실 그렇게 문제가 된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외부에서의 핍박은 신앙을 더 견고하게 하는 매개체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초대교회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바로, 다른 가르침들었습니다. 바울 사도는 이 두가지의 가르침으로 부터 교회들을 사수하려고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한편으로는 율법주의이고 한편으로는 향락주의였습니다. 갈라디아서는 교회에 침투한 율법주의를 규탄하고 있고, 디모데서를 보면 젊은 목회자 디모데에게 세상이 향락주의로 가고 교회도 향락주의를 쫒아 갈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교회를 무너뜨리는 것은 바로, 조그만 양의 율법주의와 또한 향락주의의 가르침입니다. 심지어 성경을 보면 바울이 베드로를 대면해 꾸짖었다고 하고 있습니다. 이방인들 앞에서는 자유주의자로, 유대인들 앞에서는 율법주의자로 행동하는 베드로를 대면했다고 하고 있습니다. 베드로 같은 자도, 조그만 바리새인의 누룩에 이렇게 오염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지금 예수님의 이 중요한 가르침을 빵의 문제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또 빵이 없다. 우리가 빵 가져오는 것을 잊어버렸다.” 이쯤 되면, 제자들이 참, 영적으로도 불합격이고, 세상적으로도, 참 빵점입니다. 오병이어때도, 깜빡하고 12광주리를 다 나두고 왔는데, 이번에도, 7곱 광주리를 다 나누고 왔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일반적인 회사의 사장님 쯤 되었다면, 열두제자들 다 구조조정대상입니다. 무능한 것입니다. 세상적으로도 무능하고, 영적으로도 무능하고. 그런데, 예수님은 세상적으로 무능한 것에 대한 말씀 하지 않으십니다. 왜 정신차리지 못하고, 챙겨야 될 것을 챙기지 못하냐, 나무라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이 나무라시는 것은 영적무지와 믿음없음을 나무라십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오로지 우리의 믿음과 영적이해력입니다. 무엇을 깨닫지 못했는가,, 21절을 보면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시죠, 아직도 깨닫지 못 했느냐? 이것은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입니다. 이 두 기적을 보고도 아직도 꺠닫지 못했느냐? 도대체 뭘 깨달았어야 되는 것입니까? 예수님은 빵을 곱하기 시키셔서 빵공장 처럼, 빵을 내놓을 수 있는 분이시다.. 이겁니까. 아님 예수님만 있으면 빵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이것입니까? 네 둘다 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진리를 오늘 우리가 깨우쳐야 되는 지 믿습니다. 이것이 2021년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넘치는 빵의 기적이 될 수 있는 진리입니다. 제자들이 깨닫지 못한 것은, 바로,, 8장 14절입니다. 같이 읽어봅니다. Mar 8:14 제자들이 떡 가져 오기를 잊었으매 배에 떡 한 개 밖에 저희에게 없더라 빵이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제자들에게 빵이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빵이 없었던 것이 아니에요. 몇개가 있었습니까? 한 개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깨우치지 못한 것은 그들에게도 빵이 하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생각하고 말하기를 무엇이라 하느냐,, 16절 보세요. Mar 8:16 제자들이 서로 의논하기를 이는 우리에게 떡이 없음이로다 하거 늘 있는데 없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있는데도 보지 못하는 것이에요. 물론 하나로는 부족하니까, 아예 없다라고 생각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문맥을 보면, 제자들은 빵 하나가 여전히 자신에게 있는 줄로, 모르는 상태입니다. 신기합니다. 제자들이 14절 보면 떡 가져오기를 잊었으매 라고 하는데, 배 안에 떡이 이미 있어요. 누가 챙겼는지 하나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빵을 만드는데 필수인 누룩을 이야기 하시며 바리새인들과 헤롯당들의 가르침을 주의하라 하십니다. 제자들이 그때 깨닫는 것은 우리가 빵이 없다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하시는 말이 아직도 볼 눈이 없고, 들을 귀가 없느냐 말씀하십니다. 빵 하나로, 1000명을 먹이실 수 있는 예수님의 기적을 보고도 아직 빵의 문제의 본질을 모르느냐 질책하십니다. 제자들이 보지 못하는 빵은, 그들이 나두고 갈 수 있던 빵이 아닙니다. 그들이 일곱광주리 떡을 다 놔두고 왔지만, 진정한 떡은 그 배에 같이 있었습니다. 진정한 빵은 같이 남은 단 하나의 빵입니다. 또한 이 진정한 빵은 언제라도 다시 1000명을 2000명을 숫자에 관계없이 먹일 수 있는 빵입니다. 무서운 속도로 증식될 수 있는 빵입니다. 바리새인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이 빵을 오염시키는 속도가 크다 할지라도,, 이 빵이 증식되는 속도는 따라잡지 못합니다. 여러분 배안에 있던 그들이 몰랐던, 깨닫지 못했던 빵이 무엇일까요? 아니 다시 묻는다면 누구일까요? 바로 예수님 그 자신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과 칠병이어의 기적은 모두 유대인과 이방인들에게 하나님께 들려져서 축복되어지고 찢어지어 나뉘어지는,, 그래서 그들을 살리고 먹이실 생명이 되실 예수그리스도의 몸과 그의 말씀을 이야기 합니다. 이 빵이 축복되어지고 찢어지는 그 어느 곳에서도, 이 빵이 모자라는 일이 없을 거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빵을 놓고 잊어버린다 할지라도, 잊어버릴 수 없고, 없어지지도 않는 빵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그리스도라는 생명의 떡이에요. 하늘로부터 온 빵.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것은 찢겨지고 나뉘어지는 곳마다 다시 새롭게 역사하고, 풍성히 먹이는 양식이 되는 하나님의 참 떡이라는 것입니다 . 그럼 물고기 두 마리가 의미하는 것을 생각해 봅니다. 이건 저의 생각입니다. 하지만, 타당하다 생각합니다. 물고기를 그리스어로 익투스라고 하지요. 초대교회 교인들이 그들이 서로를 알아보는 문양으로 물고기를 썼습니다. 왜냐, 익투스라는 말의 서두만 따서 풀어보면 예수는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베드로의 그 고백이 풀어집니다. 베드로의 그 고백을 하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이였고, 물고기의 문양으로 서로를 구분하는 시대에 살았던 자들입니다. 오늘 바로, 그 베드로의 고백이 나오죠. 이제까지 예수를 바로 보지 못했고 깨닫지 못했던 제자들인데도, 하나님은 베드로를 들어서 이 고백을 하게 하십니다. 예수님의 몸을 상징하는 떡,, 예수를 그리스도라 고백함을 상징하는 물고기,, 두 마리라는 숫자는 구약과 신약을, 또는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을 상징한다 볼 수 있습니다. 성경 전체의 모든 곳에서,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또한 모든 자들에게서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받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물고기가 상징하는 것은 예수의 본질입니다. 예수가 누구이시냐 이거에요. 떡이 상징하는 것은 예수님의 사역입니다. 예수님이 우릴 위해 무엇을 하셨냐에요. 하늘에서 내려오셔서 십자가에서 찢어지시고 나뉘어주신 것, 그리고 부활하신 것,, 찢어지셔서 없어진 게 아니라, 더 풍성하게 더 많은 사람을 살리신 부활이 되셨잖아요. 우리가 깨닫고 섭취해야 하는 진리는 바로 예수님이 누구신지, 그리고 무엇을 하셨는지, 왜 하셨는지 입니다. 바로 여기에 생명이 있습니다. 여기에 주림과 배고픔을 물리치는 영원한 공급의 기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벳새다로 가서 소경을 고치시는 예수님을 보십시오..아니 오늘 말씀 8장이 있기전 바로전 7장에, 귀먹어리를 고치시는 예수님을 보세요. 귀머거리와 봉사를 고치시는 에피소드가 지금 칠병이어의 에피소드 앞뒤로 포진 하고 있습니다. 들을 수 없는 자와 볼 수 없는 자를 고치시는 예수님을 보세요. 7:34절을 보면 주님을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셨다고 합니다. 한번 읽어보세요. Mar 7:34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에바다 하시니 이는 열리라는 뜻이라 바리새인들을 보며 탄식하신 예수님은 곧 봉사를 보시며 탄식하신 것과 마찬가지 모든 보지 못하는 자들을 향한 마음의 심정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보지 못함이 이렇게 예수님의 마음을 탄식케 하십니다. 고치시는 방법도 비슷하십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입에 있는 침을 같다 대 십니다. 고쳐지는 과정도 비슷합니다. 한번에 이것이 고쳐지지 않습니다. 점차적으로 그들의 시야와 청각이 회복됩니다. 예수님이 능력이 없어서 한번에 못 고치시겠습니까? 그들이 어떻게 회복될지를 예언해 주시는 것입니다. 부활의 예수를 듣고 깨닫고, 보고 이해할 그 과정이 시간이 걸리고 점진적으로 이루어질 것을 말씀하십니다. 한번에 보지 못하고 한번에 듣지 못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결국 희망이 없어 보이는 이 세대도 결국 어떻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까? 예수님께서 치유해 주실 것이라는 희망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이해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 제자들을 예수님이 꾸짖으시지만,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그들이 이해할 수 있을 때까지 그들이 깨달을 때까지 예수님은 포기하지 않으시고 그들과 동행해 주십니다. 누가복음에 나오는 엠마오로 향한 제자들을 보세요. 그들이 깨닫지 못하니까, 구약의 예언으로부터 하나하나 다 설명해 주시고 이해시켜 주신 것입니다. 그러자 그들이 눈이 띄여 집니다. 어느 순간 그들이 눈을 뜨고 부활하신 예수를 알아보게 됩니까? 바로, 예수님이 빵을 들어 축사하시고, 빵을 찢어 나눠주시는 순간,,,입니다. 우리가 한번 같이 가서 봅니다. 누가복음 30절-31절 Luk 24:30 저희와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매 Luk 24:31 저희 눈이 밝아져 그인줄 알아 보더니 예수는 저희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자 보세요. 이게 오병이어의 기적이고 칠병이어의 기적입니다. 떡을 축사하시고, 떼어주시는 그 때, 장님이였던 저희가 눈이 띄여지는 것입니다.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보더니,,, 예수는 저희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 지라… 예수님이 더 이상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들 어디에 보이기 시작합니까? 마음에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에요. 이게 봐로 소경이 눈을 뜨는 현상입니다. 한번에 되는 게 아니에요. 예수님은 그들을 끝까지 책임져 주시고 이해 될 때까지 함께 해 주신 것입니다. 이 떡이 누구냐 이거에요. 우리를 위해 나뉘어진 떡이 누구냐 바로,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이것을 제자들이 이제는 마음으로 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예수의 고난과 십자가의 죽음을 이제는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겁니다. 34절의 그 제자들의 고백을 보세요.. Luk 24:34 말하기를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나타나셨다 하는지라 Luk 24:35 두 사람도 길에서 된 일과 예수께서 떡을 떼심으로 자기들에게 알려지신 것을 말하더라 주꼐서 과연, 살아나시고,,, --- 이것이 가장 중요한, 칠병이어의 요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께서 떼어져서 나뉘어진 것은, 그의 죽음을 말하지만, 그것이 4000명을 먹이고 남을 양식이 된 것은 그의 부활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제자들이 그것을 받아 먹으며 이해하게 된 것입니다. 이제 성도님들 우리가 매듭 지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이방인으로써, 큰 특혜를 받았습니다. 유대인들인이 거부한 특혜를 우리가 입은 것입니다. 이것으로 먼저 감사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칠병이어의 기적은 이방인들에게 보여진 부활의 사건이 온 세계의 펴져 나감을 의미합니다. 제자들을 통해 전파되어진 이 복음의 전파가, 어느덧, 전세계를 덮고 남을 만큼, 풍성하게 되었습니다. 모두가 먹고 넉넉해질 만큼의 시점까지 도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중요한 단어하나를 가지고 마무리해보길 원합니다. 엠마오로 향하던 제자들이 예수를 경험하게 된 이유 중 하나로 그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두 사람도 길에서 된 일과,,, 예수께서 떡을 떼심으로 자기들에게 알려지신 것을…” 떡은 우리가 다루었죠. 그런데, 또 중요한 것이 길에서 이루어진 일이라고 합니다. 길에서 이루어진 일이 뭐냐 이겁니다. 오늘 다시 본문의 말씀으로 가면 길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8:3절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8:3 만일 내가 저희를 굶겨 집으로 보내면 길에서 기진하리라 그 중에는 멀리서 온 사람도 있느니라 저희를 굶겨 집으로 돌이켜 보내는 길은 어떻게 되겠다고 말씀하십니까? 기진하리라… 쓰러진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로 이런 길을 가기를 원치않으십니다. 예수님이 원하시는 길은 바로, 엠마오의 제자들이 갔던 길, 예수님과 동행하던 길, 말씀을 받고, 예수님과 떡을 떼고 교제하러 들어가는 길입니다. 풍족히 먹고 풍족히 만족할 수 있는 길을 예수님이 열어주셨습니다.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의 사실을 먹고 따르는 길인줄로 믿습니다. 오늘 이 길에 대해서 예수님이 이 8장 마지막에 말씀하십니다. 베드로를 보시며 그리고 제자들 모두를 보시며 자신이 가야하는 길을 말씀하시다, 제자들 저희들도 가야하는 길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8장 34절 35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Mar 8:34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Mar 8:35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우리가, 2021년 칠병이어의 기적을 계속 경험해 갈 수 있는 길을 여기서 말씀해주십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길을 같이 가야 합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쫓는 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예수님의 복음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길을 가는 사람들입니다. 혹시 2021년 내가 이런 사업을 통해 부자가 되야지, 내가 이런 목표 이런 계획 이런 것들을 이루어야지… 여러분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우리는 너무나 자주 내 삶에서 천하를 얻을 생각을 먼저 합니다. 2021년 내가 세우기 원하는 계획을 다시 한번 점검해 보세요. 나의 천하를 생각하는 것인지 아닌지. 그것은 우리가 풍족한 생명을 누리는 삶과 거리가 멀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목표로 삼고, 우리가 다짐해야 하는 길이 있습니다. 거기에 칠병이어의 기적이 있습니다. 그 길은 예수를 위한 길, 복음을 위한 길,,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 예수를 쫓아가는 길, 그 길에,,, 부족함이 없고, 일곱광주리가 남는 놀라운 기적의 연달음이 준비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38절에서 이렇게 주님이 나에게 말씀하십니다. 38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 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주님이 부끄러워 할 자가 되지 않으시길 축원합니다. 예수가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본질을 부끄러워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모든 것을 부끄러워 할 수 없습니다. 그분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을 어찌 우리가 부끄러워 하겠습니까? 하지만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주님을 부끄러워 하고, 주의 말씀을 의심하는 자들이 지금 무수히 생기고 있습니다. 2021년 우리가 살 길은 우리가 풍성하게 축복 받을 길은 오로지 예수를 주로 시인하는 길을 걷는 것이며, 예수의 모든 말씀을 따라 행하는 길인줄로 믿습니다. 이 길을 우리의 살 길로 지금 다짐하고 또 결단하며 우리 칠병이어의 기적이 내 삶에 연속으로 이루어지는 기적이 임하도록 우리 이 시간 기도하며 나가도록 합시다.
김진우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