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t 13:1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 Act 13:2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가라사대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Act 13:3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오늘 사도행전 13장은 사도행전에서의 분기점입니다. 이제까지의 사도행전과 앞으로의 사도행전이 갈라지는 역사적 전환점입니다. 오늘 이야기의 먼저 배경을 봐야합니다. 13절 1절에 한 교회 이름이 나오고 있죠. 그 교회 이름이 예루살렘 교회가 아닙니다. 무슨 교회라고 하고 있습니까? 안디옥 교회 . 안디옥 교회라면 원조 예루살렘 교회를 오히려 도와주려고 헌금을 모아 바울과 바나바 편으로 보낸 교회입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핍박받고 궁핍하고 어려운데 오히려 나중에 세워진 안디옥 교회가 힘을 발휘하고 있는 거예요. 어떤 배경에서 이 교회가 세워졌는지 볼 필요가 있습니다. 11장 19절 가봅니다.
Act 11:19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을 인하여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도를 유대인에게만 전하는데 Act 11:20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그러니까, 스데반의 순교이후, 성도들이 핍박 받아 흩어지고 있을 때 이름 모를 성도들이 안디옥까지 올라가서 복음을 전하는데 처음에는 유대인에게만 전했는데 20절 보니까 그 중 몇 사람이 안디옥에서 누구에게도 예수를 전파했다? 헬라인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생긴 겁니다. 도저히 성경의 대한 배경 지식이 없는 자들인데 예수님을 주로 받아들이는 역사가 일어나는 겁니다. 유대인들에게는 메시야에 대한 배경지식이 있죠. 유일신 사상이 자리 잡혀 있어요. 그 배경위에, 메시야가 예수라는 것만 잘 전하면 됩니다. 그런데 헬라인들은 예언이 뭔지 여호와 하나님이 누군지 알 리가 없습니다. 성경의 깊은 의미와 예언의 성취를 이해하기에는 그들이 살아온 이방 문화와 환경이 너무 다르다는 것이죠. 그런데도 몇 사람이 이방인들에게 예수를 전했는데 결과가 어땠다? 21절,
Act 11:21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다한 사람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수다한 사람, 정말 많은 사람이 믿고 주께 돌아왔다고 했습니다. 그저 몇 명에게 전도하려고 했는데 몇 명이 아니라 수십 명도 더 되는 사람들이 복음을 막 받아들이는 거예요. 이유가 분명히 나옵니다. 누구의 손이 함께 하니까?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니까. 복음의 열매란 결국 누가 주도 합니까? 주님의 손. 주의 손이 복음의 결실을 만듭니다. 예루살렘에서는 유명한 베드로의 설교를 통해 삼천, 오천씩 주께 돌아오는 기적이 있었습니다. 이 안디옥에서는 이름 모를 몇 명의 유대인들로 인해 이방땅 처음으로 교회가 세워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다시 원인과 결과를 짚어봐야 합니다. 분명 주의 손이 역사하셨어요. 하지만, 그 원인이 무엇일까? 무엇이 발단이 되어 그들이 거기로 올라가게 됐는가? 어느 때에 무슨일로 인해, 그들이 거기 갔습니까? 19절로 다시 읽어봅니다.
Act 11:19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을 인하여
스데반이 어떻게 됐습니까? 죽었습니다. 성난 군중들에게 예수그리스도가 주라고 담대히 전하다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바로 그의 죽음으로 인해, 어디서 기회가 열리는 겁니까? 안디옥. 스데반의 피흘림으로 안디옥에서 생명의 기회가 열매맺던 것이였습니다. 스데반은 유대인이죠. 하지만, 그의 이름은 유대인 이름이 아닙니다. 헬라어 이름으로, 왕관, 마라톤 승리자에게 씌워주던 그 화관 이라는 뜻입니다. 스데반은 헬라파 유대인이였어요. 헬레파 유대인들이 스데반의 죽음으로 흩어져 헬라땅에가서 복음을 전하니 헬라인들이 주님을 믿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정통파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에게 복음 전하는 것에 굼떴습니다. 베드로는 정통파 아닌데도 이방인 고넬료를 만나는 것을 꺼려했잖습니까. 유대인의 틀을 깨고, 복음을 가지고 문화를 넘고, 언어를 넘은 사람들로 인해, 이 안디옥 교회가 생겼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바탕에는 죽음이라는 희생이 있었다는 겁니다. 모든 교회의 시작을 위해서 누구의 피가 먼저 뿌려졌는지 우리는 압니다. 예루살렘에서 뿌려졌던 다름 아닌 우리 주 예수님의 보혈이죠. 거기서 교회가 생겼잖아요. 그러니, 이방 땅 이 안디옥에 교회를 세우기 위해 주님은 누구의 흘린 피를 받아 주셨다는 것입니까? 스데반 집사였다는 것이에요. 스데반 집사의 마지막 외침을 여러분 기억하십니까, 누구와 비슷한지 한번 들어보십시요. 7장 59-60절,
Act 7:59 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Act 7:60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누가 먼저 이렇게 죽어가면서 동일하게 말한 적이 있습니까? 예수님이 이렇게 말했어요. 스데반은 예수님의 죽음을 닮아 죽는 겁니다. 그런 죽음으로 교회가 탄생하는 것입니다. 적을 미워하고 심판해 달라는 죽음이 아니라, 온전한 순종, 죽음으로까지의 순종,, 그리고, 자신을 죽이는 자까지를 용서하는 사랑,, 이런 희생에 교회의 기초를 놓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스데반의 삶을 바로, 그의 이름처럼, 교회를 세울 면류관으로 삼으시고 그의 죽음을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이게 안디옥 교회 같은 교회가 탄생하게 된 배경이에요. 우리 한국교회도 똑같지 않습니까? 스데반 같은 자들이 일찍이 이 땅에 와서 죽음으로 교회를 세우는 데 공헌했습니까? 양화진묘지에 가보면 셀수없는 증거들이 거기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두가지중 한가지, 참 교회를 세우길 원한다면, 그게 이 교회에서건 내 가정에서건, 내 직장에서건, 내 삶, 내 인생의 전반에서건,, 교회를 세우길 원한다면, 스데반 같은 죽음을 우리는 각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스데반 같은 삶과 희생을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제 두번째, 이렇게, 사람들이 막 교회로 들어오니까, 감당이 안되는 겁니다. 가르치고, 리드 할 자가 필요한 것이에요. 그래서 예루살렘 교회에서 사람을 보냈다고 합니다. 다음 절 11장 22-24절
Act 11:22 예루살렘 교회가 이 사람들의 소문을 듣고 바나바를 안디옥까지 보내니 Act 11:23 저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은 마음으로 주께 붙어 있으라 권하니 Act 11:24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더라
여기서, 바나바에 대해 가장 첫번째 나오는 말에 주목해 주세요.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라 하지 않았습니다.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 먼저 말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사람이라 성경이 먼저 이야기 합니까?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다. 우리가 깊이 묵상해야 할 바입니다. 질문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안 착해도 성령 충만 가능합니까, 안 가능합니까? 그런 사람 봤습니까, 안 봤습니까? 봤어요. 성령충만해 보이는 사람들. 안착한데 가능합니다. 교회들에 그런 사람들의 예가 많습니다? 또, 안 착한데 믿음 큰 사람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어요. 하나님은 착하지 않아도 성령 충만 주시고, 착하지 않아도, 믿음 주실 수 있습니다. 성령 충만하다 해서 착해진다는 것이 아닌 것을 우리가 봤고, 믿음 많다 해서 착한 것도 아니라는 것을 우리가 봤습니다. 지금 현시대 우리 교회에 필요한 것이 성령충만 믿음 충만 맞습니다. 하지만, 오늘 예루살렘 교회에서 안디옥 교회를 리드할 한 사람을 선정하는 데 그들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사람의 가치가 뭐였다는 겁니까? 바로, 착함이였다는 것이에요. 예루살렘교회에 성령충만한 사람, 믿음이 큰 사람 많았어요. 하지만, 바나바는 착함이라는 보배 같은 성품을 갖고 있었다 이것입니다. 생각해 보기 원합니다. 세상이 교회를 바라볼때, 기대하고, 바라는 게 무엇일까? 성령충만 믿음충만 “할렐루야, 믿습니다.” 이것이겠습니까? 우리 교회가 세상에서 인정받고 복음의 힘을 발휘하는 것은 성령충만과 믿음 충만이 결국, 착함이라는 결정체로 세상에서 인정 받아야 하는 것이에요. 내 아무리 성령 충만하고 믿음 충만 하다 해도, 내 행동과 내 입술의 언행에 착하다 할 만한 것이 없다면, 복음을 내가 무엇으로 입증하겠냐 이것입니다. 보세요. 바나바를. 바나바의 착함이 어디서 드러납니까? 바로 다음절에 드러납니다. 24절 보면 바나바의 사역을 통해 큰 무리가 주께 더했다 했습니다. 사역 성공했죠. 그런데, 그런 공로와 자리에 알박기 하고 앉아있는 것이 아니라, 누구를 데리러 갑니까. 25절 읽습니다.
Act 11:25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지금 사울이 어떤 상태인줄 아십니까? 왕따 당한 상태입니다. 잊혀진 상태에요. 예수님을 만나고 완전히 바뀌어 예루살렘으로 왔을때, 모두가 바울 보기를 원치 안했습니다. 그 때 누가 먼저 옆에서 바울을 지지 했는지 기억하십니까? 바나바에요. 그런데, 바울은 너무 설치는 겁니다. 분위기 보지 않고, 사정 보지 않고, 유대인들 사이에서 헤집고 다녔을 거에요. 성경을 보면 사도들이 바울의 고향, 다소로 보냈다고 했어요. 분명 여기 나두면 안되겠다 싶었다고 생각합니다. 시한 폭탄을 예루살렘에서 터트리게 할 수 없잖아요. 그래서 역사속에서 그렇게 잊혀질 사람이였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시간이 흘렀는데, 바나바가 바울을 생각한 것입니다. 바울에게 자신과 동등한 자리로 와서 시무하라 한 것입니다. 바나바는 자기 밭을 다 바친 사람입니다. 바나바는 모두가 바울에게 등돌릴때, 밀어준 사람이에요. 바나바는 자신의 성공의 정점을 달릴때, 아무도 생각지 않는 자를 찾아내어 자기 자리를 마다 하지 않는 사람이였습니다. 성령충만해서, 믿음 충만해서 그런게 아닙니다. 이 사람은 착한 사람이라서 그래요. 그래서 오늘 기도할 포인트. 우리는 교회 부흥을 위해서 착한 사람 되야 합니다. 영혼 구원을 위해서 좋은 사람 되야 하는 겁니다. 세상이 칭찬할 만한 사람 되야 되요. —------------------------- 이런 바나바와 바울 밑에서 교회가 양육받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를 성경이 똑똑히 보여줍니다. 26절 함께 읽습니다.
Act 11:26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컫음을 받게 되었더라
바나바와 바울이 일년간 힘을 합치어 가르치니 그 무리가 어떤 칭함을 받았다? 그리스도인이라. 크리스챤이라 일컫음을 받았다. 이게 왜 중요합니까? 하나님께만이 아니라, 세상에서 인정받았다는 것이에요. 지금 어떻습니까? 우리는 믿으면 크리스챤이라는 타이틀을 그냥 주지 않습니까? 교회 다니면 크리스챤이라는 명칭 당연히 따라오지 않습니까? 여기는 그렇지 않았다는 겁니다. 제자들이 비로써 일년 후 크리스챤이라 일컬음을 받았다. 우리는 거꾸러 생각하죠. 크리스챤들이 제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열심히 우리도 제자 되도록 노력하자 예수님을 따라사는 제자되자.. 그게 아니에요. 순서가 크리스챤이 나중입니다. 제자들이 세상에서 비로써 인정받을 때, 그게 뭐라구요? 크리스챤이다. 지금 세상에서는, 크리스챤들을 볼 때, 제각기 모습입니다. 이런 크리스챤도 있고 저런 크리스챤도 있고, 별난 크리스챤, 얌전한 크리스챤, 한 성질 하는 크리스챤, 순한 크리스챤,, 크리스챤이라는 말은 우리가 제각기 다른 우리만의 특징을 보일 때, 불릴 수 있는 명칭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 같은 동일한 모습을 보일 때, 불리는 명칭입니다. 바나바가 리더가 되고, 바울이 동참하러 간 안디옥에서의 크리스챤의 모델은 누구였을 까요? 당연히 그들을 가르친 바나바일 겁니다. 그는어떤 사람이었다. 착한 사람이었다. 얼마나 착했을까요? 성령충만과 믿음충만이 뒷 받침된 착함.. 그냥 착함이 아니라, 성령과 믿음이 받침이 된 착함은 착함에 착함을 더하겠습니까? 감하겠습니까? 더하죠. 바나바는 착한 것이에요. 이것을 안디옥 교회 제자들은 배우고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가르치는 복음속에서. 그들이 전하는 예수님의 착함을 배우는 것입니다. 착함이란 선하다는 단어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왜 나를 착하다 하느냐 하나님 외에는 착한 자가 없는니라. 맞습니다. 하나님외에는 착한 분이 없으십니다. 그렇기에, 주님은 우리 보고 착하라 하시는 것이에요. 하나님이 선하시기에, 우리로 선하라 하시는 겁니다.
교회를 위해서, 교회 세우기 위해서, 이 시간 우리 두 가지 붙잡고 기도합니다. 하나는 스데반 같은 희생, 다른 하나는 바나바 같은 착함. 이 두 가지로 우리 주님의 교회 세우기를 원합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이 교회에서, 모두가 안디옥의 크리스챤 처럼 되는 교회 세우길 기도합니다.